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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5상6
**跋: 丁酉(1957)...金元喆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사담(沙潭). 증조할아버지는 건공장군(建功將軍) 충무위(忠武衛) 부사직(副司直) 김예강(金禮剛)이고,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윤검(金允儉)이며, 아버지는 옥과 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계공랑(啓功郞) 조한신(曺漢臣)의 딸이다. 아우인 김홍미(金弘微)는 조식(曺植)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당시 형제가 옥당(玉堂)[홍문관]에 재직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김홍민(金弘敏)[1540~1594]은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선조 17) 이조 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의정부 사인에 이어 1590년(선조 23)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1579년(선조 12) 천거로 옥당에 선임되어 예조 좌랑이 되었다. 또한 여름에는 제천 현감이 되었고, 1581년(선조 14) 8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 여름에 다시 홍문관 전한, 가을에 청주 목사 겸 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은 지방에서 속리사(俗離寺)를 거점으로 의병 600명을 일으켜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호남 지역에서의 노략질을 막는 큰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다. 『사담선생집(沙潭先生集)』은 1957년 후손 김원철(金元喆)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책 끝에 김원철의 발문이 있다. 권1은 만사 13수, 소(疏) 1편, 서(書) 1편, 권2는 부록으로 행장·가장(家狀)·행적 각 1편과 만사 9수, 제문·행장·사담전(沙潭傳)·봉안문·지(誌)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근암서원은 원래 1544년(중종 39) 지방 유림이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었는데, 1693년(숙종 19) 김홍민과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669년(현종 10)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86년(정조 10) 이구(李榘),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을 추가 배향하여 모두 7현을 모시고 있다. 1579년에 김홍민이 제천 현감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후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