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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리(千萬里)[1543~?]는 명나라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1549~1598] 휘하의 조선 원병으로 참여하여 평양·곽산·동래·울산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전후 명군이 귀국할 때 따르지 않고 조선에 정착하였다.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에 집성촌이 있다.
본관은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이다. 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 어머니는 병부시랑(兵部侍郎) 전탁(錢鐸)의 딸이다.
천만리는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중국에서 1571년 무과 급제 후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되었으나, 남의 참소(譖訴)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를 하였다.
귀양에서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 아들 천상(千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전투를 비롯하여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이승훈(李承勛)은 귀국하였으나 천만리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선조(宣祖)[재위: 1567~1608]는 천만리의 전공을 생각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하였다. 천만리의 아들 천상도 뒤에 ‘한성윤’으로 승진시켰다. 또한,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에는 대보단(大報壇)에 종향(從享)하도록 하였고, 순조(純祖)[재위: 1800~1834] 대에는 1827년(순조 27) 부제독(副提督) 이여매(李如梅)의 고사(故事)를 끌어다가 신주(神主)를 옮기지 않도록 하는 은전을 내렸다. 고종(高宗)[1863~1907] 대에 천만리의 공을 다시 기렸는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901년(고종 38) 기사에 천만리에게 시호를 내려 달라는 중추원 의관 이봉래(李鳳來) 등의 상소가 있었다. 9년이 지난 1910년(순종 4)에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다.
천만리의 후손들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1989년에는 보령의 후손들이 송학리에 신도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