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고종 16)∼1949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길원(吉元), 호는
퇴산(退山)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으로,
경상남도 밀양부(密陽府) 청운리(靑雲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강문영(姜文永), 조부는
도암(道巖) 강만형(姜晩馨), 부친은
주사(主事) 강상희(姜象熙)이다. 모친은
벽진이씨(碧珍李氏) 이석토(李錫土)의 딸이다.
학문에 재능이 있어, 20살이 되자
허전(許傳)의 제자로 실학(實學)에 관심이 많던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광무 10) 부친의 부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연정(高淵亭)을 짓고 거하였다. 부친이 병으로 눕자, 단지효행(斷指孝行)을 하였으며,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자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이후 오직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연구하였고, 그의 학행이 널리 알려지자 인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몰려들어 온전히 집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이들을 이름 하여 '고연학도(高淵學徒)'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향사(鄕士)들을 모아 함께 동약계(同約契)를 만드는 등 향촌자치에 깊게 관여하였다. 1931년 스승
소눌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심상(心喪)을 지내고 유집(遺集)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938년
봉계(鳳溪)에 단산서당(丹山書堂)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매진하다 1949년 사망하였다. 묘는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저서로는
『퇴산선생문집(退山先生文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