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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나무장14상2
**도영하 1655년~1734
**도영하(都永夏)[1655~1734]는 문과에 합격한 후 내·외직을 두루 재직하였다. 비교적 당파적 성향이 강하지 않았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묘 배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자화(子華), 호는 약오(藥塢). 행정(杏亭) 도형(都衡)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생원인 묵헌(默軒) 도처원(都處元)이고, 어머니는 박진창(朴震昌)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숙부 도처형(都處亨)이 문과에 합격하였다.
도영하는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용각리에서 태어났다. 1687년(숙종 13) 문과에 급제하고 풍기군수에 이어 양산, 하동, 개성 등의 수령을 지냈다. 1726년(영조 2)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敎), 첨지사(僉知事)[정3품 당상관] 등을 지냈다. 김장생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유계서원(柳溪書院)[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을 세우고 원규 절목(院規節目)을 스스로 만들었다. 유계서원에서는 정곤수(鄭崐壽) 등을 배향하였다.
도영하관련항목 보기가 살았던 시기는 이미 당색에 따른 구별과 배제가 뚜렷해진 시기였지만, 그 자신은 이런 경향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서로 4권 2책의 『약오집(藥塢集)』이 있다. 「사계선생종사소(沙溪先生從祀疏)」는 김장생이 나라와 학문에 끼친 공적을 열거하며 선현들의 업적에 비길 만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도영하는 이를 토대로 김장생의 문묘 배향을 주장하였다. 「정유과사자명소(丁酉科事自明疏)」에서는 풍기군수로 있을 때 나왔던 향시 부정에 대한 소문을 해명하였는데, 지방의 유생들이 당파가 다른 것을 이유로 자기들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붕당설(朋黨說)」은 붕당을 없애고 그 폐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