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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나무장14상1
**박치준
박치준(朴致準)[1838~1898]은 자인향교(慈仁鄕校) 도유사(都有司)로 있으면서 향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서학(西學)의
확산에 대응하여 정통 성리학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박치준의 자는 성휴(聖休), 호는 희암(希庵),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봉상시 주부를 지낸 요산(樂山) 박운달(朴雲達)[1491~1558] 대에 청주에서 자인현 대원리(大院里)로 이주하였다. 할아버지인 송숙재(松淑齋) 박항돈(朴恒敦)이 다시 대원리에서 다문리(多文里)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문암(文巖) 박기환(朴奇煥)으로 김익동(金翊東)과 교유(交遊) 하였다. 어머니는 류연중(柳演中)의 딸 문화 류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김영신(金永臣)의 딸 천안 김씨(天安金氏)이다
박치준은 1852년(철종 3) 묵암(黙庵) 배극소(裵克紹)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부친의 상을 마친 후 어머니의 명으로 수년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후 산속에 은거하며 정사를 지어 괴정(槐亭)이라 이름을 지었고, 스스로의 호를 ‘희암(希庵)’이라 하였다.
박치준은 이웃 고을의 조유승(曺有承)·조병숙(趙秉淑)·김관교(金寬敎)·전석신(全錫臣)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삭망(朔望)에는 정읍례(庭揖禮)를 행하고, 가절일(佳節日)에는 종족의 노소를 모아서 ‘근학문(勤學文)’을 읽고 경계토록 했다. 이외에도 어머니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직접 탕약을 지어 올리며 보살폈고, 돌아가신 후에는 여묘를 하였다.
1891년(고종 28) 자인현감(慈仁縣監)으로 부임한 이만윤(李晩胤)은 박치준의 학문과 효행을 듣고서 학궁(學宮)을 맡기고자 했으나 거절하였다. 하지만 현감의 거듭된 요청으로 1892년(고종 29) 도유사로 취임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이때 장학문(奬學文)과 강학도(講學圖)를 만들어 향학(鄕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