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19.5*27.5센치
보외1층33-1-7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출신 문인.
최동률(崔東嵂)[1585~1622]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진백(鎭伯), 호는 다천(茶川)이다. 최동률은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성품은 단정하고 깨끗하였다.
최동률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 최해(崔海)는 발포만호(鉢浦萬戶)를 지냈고, 할아버지 최종옥(崔宗沃)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아버지 최계(崔誡)는 현령으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창신교위(彰信校尉) 설근(薛勤)의 딸인 순창설씨(淳昌薛氏)이다. 부인은 현령(縣令) 권사악(權士諤)의 딸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인데 슬하에 최절남(崔節南), 최익남(崔翊南) 두 아들과 이정숙(李廷橚), 안양한(安良漢)에게 출가한 두 딸을 두었다.
최동률은 아버지의 명으로 1605년부터 1613년까지 한강(寒岡) 정구(鄭逑),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맹자』, 『소학』, 『통감』, 『경재잠』 등을 배워서 문학과 행의(行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1611년(광해군 3)에 종형 최동립(崔東岦)과 함께 회재·퇴계 두 선생 변무소(晦退兩先生辨誣疏)에 참여하였고, 1618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이후로 환향하여 다천(茶川) 위에 한 집을 짓고 여러 아우와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도 강론하며 도의로 사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