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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조계종 초대총무원장,2대 종정 청담(靑潭) 순호(淳浩)스님 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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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1-조계종 초대총무원장,2대 종정 청담(靑潭) 순호(淳浩)스님 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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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1층34-1

    **청담(靑潭, 1902~1971)

    청담 순호(靑潭 淳浩) 스님은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면서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거대한 버팀목이었다. 스님의 본명은 이찬호(李讚浩), 도호(道號)는 올연(兀然), 법명은 순호(淳浩)이고, 불교정화운동 시기에는 청담(靑潭)을 법호로 썼다.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당에 다니다 191817세 나이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진주지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해 학생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이로 인해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주만에 방면됐다.

    1921년 진주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결혼했다. 그 해 4월에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 남강 인근 진주 호국사(護國寺)에 들렀다가 선학원의 대강백 서응(瑞應)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금강산 마하연의 포명(抱明) 스님을 만나 스님의 지도하에 불교에 귀의했다.

    청담 스님은 다음해 해인사로 출가를 단행하지만,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후 백양사로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의 한분인 백용성 스님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출가의 꿈은 좌절됐다.

    결국 1923년 지인 박생광(朴生光)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다가 1925년 일본 운송사(雲松寺)에서 출가해 약 1년간 수행하고 25세 되던 1926년 귀국해 경남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경봉(鏡峰) 스님과 출가 인연을 맺었으며, 이때 받은 법명이 바로 순호(淳浩)였다. 그리고 1927년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했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28, 운허(耘虛 龍夏, 1892~1980) 스님과 함께 서울 각황사(覺皇寺)에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며 불교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당시 스님은 수좌 50인과 함께 조선불교학인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예산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의 만공(滿空 月面, 1871~1946) 스님을 찾아간 청담 스님, 그날은 섣달그믐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방문 두드리는 바람만 두 스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날의 일에 대해 청담 스님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밤을 지새우며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했다. 불교 정화의 선두에 줄곧 서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날 만공 스님과 나눈 대화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이날 밤의 결의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청담 스님은 정화불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출가수행자의 길에 대한 뚜렷한 신념도 있었다. “성불을 한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 다시 생()을 받아도 이 길을 다시 걷겠다.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살아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청담 스님은 정화불사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담당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단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만공 스님의 지도로 수선안거(修禪安居)한 스님은 29세 되던 1930년 만공 스님에게 견성(見性)을 인가 받아 올연(兀然)을 도호로 받았다.

    그 후 1931년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은 고향인 진주 연화사(蓮華寺) 법당 낙성법회에 초청법사로 참석했다. 거기서 만난 노모의 간절한 소망을 차마 거부하지 못해 옛 속가를 방문했고, 스님은 그날 밤 계를 범하고 이혼했던 부인과의 사이에 딸을 얻으니, 그분이 바로 비구니 묘엄(妙嚴, 1931~2011) 스님으로, 뒷날 한국 비구니 승단을 이끌어, 수원의 비구니 사찰 봉녕사(奉寧寺)를 일군 분이다.

    이후 청담 스님은 10년 간 맨발로 다니며 참회 정진했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금강산 유점사, 합천 해인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전국 선원에서 철저한 인욕행을 실천했다.

    계를 범한 죄책감에 전국의 선원을 돌며 목숨을 건 참회의 용맹정진수행을 거듭한 것이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기상과 열정, 그리고 간절함이 있었다.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공부하고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고 수행에 몰두했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을 남겨놓고 도반들이 모두 떠나고 말았다. 그 같은 일도 모른 채 스님은 화두를 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정에서 나온 스님은 도반들이 모두 백담사(百潭寺)로 떠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밤도 깊었고, 폭설이 내려 움직일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일. 스님은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돼 잘 됐다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했다. 식량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다. 당시 홍천군수와 경찰서장 꿈에 설악산 산신이 나타나 말했다.

    지금 봉정암에 도인이 공부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양을 하라고 했다.

    두 사람의 꿈이 일치하는 것이 신기해 부하 직원을 동원해 봉정암에 갔더니 피골이 상접한 청담 스님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34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상래불조둔치한(上來佛祖鈍痴漢) ―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안득료지자변사(安得了知衒邊事) ―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약인간아하소능(若人間我何所能) ―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로방고탑경서방(路傍古塔傾西方) ― 길가의 오래된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모든 불조가 어리석다는 것은 지혜롭다, 어리석다라는 이분법 논리를 초월한다.

    현학(玄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라는 표현 역시 깨달음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를 아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서쪽으로 기운 오래된 탑신은 서방정토의 깨우침은 본시 깨달음의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속세 번민 없이 주어진 길을 본성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혜안이 열린다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Phaeton

    1935년 선학원(禪學院)에서 선 부흥대회를 조직하고 조선불교선종을 창종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1년에는 운허 스님이 찾아와 유교법회(遺敎法會)에 대해 상의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해 3, 승풍 회복과 불맥 계승을 취지로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유교법회가 10일 동안 개최됐다. 청담 스님은 운허 스님, 적음 스님과 함께 유교법회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유교법회에는 만공(滿空) 스님, 동산 혜일(東山 慧日, 1890~1965) 스님 등 당대 고승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유교법회에 동참한 스님들은 당시 불교계가 가진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부처님의 유훈인 <유교경(遺敎經)>과 율장(律藏), <범망경(梵網經)> 그리고 조계종 종지를 중심으로 일정이 진행됐다.

    ※유교법회(遺敎法會)---유교법회란 1941년 조계종의 수행자들이 불조혜명(佛祖慧命-법신의 지혜)을 계승하고, 계율과 선을 일치시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유교경>에 의지해, 조계종 종지를 선양한 법회였다. 아울러, 유교법회에 담긴 정신,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조계종이 성찰해야 할 점을 제시했다. 그는 승가의 불화, 세속화와 물신풍조의 팽배, 현실안주 등을 중요한 문제점으로 제시했다.

    이어서 청담 스님은 유교법회 후 범행단(梵行團)을 조직해 선()과 율()의 종지를 선양했다. 이 때 만공⋅서응⋅청담⋅운허⋅동산 스님 등 고승 40여 명이 참석했다. 이 해 가을, 청담 스님은 예산 수덕사(修德寺)에서 퇴옹 성철(退翁 性徹, 1912~1993) 스님을 처음 만났다.

    1943년 보은 법주사 복천암(福泉庵)에서 성철 스님과 수행하던 중 초파일에 금강회사건이라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연행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불교정화운동을 향한 스님의 원력은 성철 스님과 30여 대중이 함께 한 1947봉암사 결사(鳳巖寺結社)’로 이어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54, 선학원에 불교교단정화추진위원회가 설치되고 전국 비구승 대표자 회의를 개최해 정화운동을 총지휘했다.

    1955년 조계종 정화에 앞장서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했으며, 다음 해 사임한 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했다. 총무원장 재직 시 청담 스님은 조계사에 주석했다. 당시 스님은 매일 대중공양 때마다 자자법회(自恣法會)를 거행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전통의식인 자자를 통해 수행자의 자세를 흩트리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이때 스님은 자자에 의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되고, 마음의 편안을 되찾으려면 잘못을 참회하고, 참회하려면 허물을 고백하고, 고백함으로서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이듬해 12월에는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58년에는 태국에서 열린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61년 중창한 서울 도선사(道詵寺) 주지 소임을 맡았고,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대종사(大宗師) 법계를 품수(稟受)했다.

    19669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재임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재단법인 선학원 제7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612월 대한불교조계종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에 추대됐다.

    1970년 광복절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1971년 청담 스님은 도선사(道詵寺)에서 갑자기 입적했다. 세수 70, 법랍 45. 병명은 과로에 의한 뇌졸증이었다.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중추를 이루는 조계종이라는 종단의 기초를 닦고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스님이 걸어간 길은 중생교화를 위한 인욕과 쉼 없는 보살행 실천의 연속이었다.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수도정진에 임했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번뇌를 타파하기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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