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사진참조)
크기:31*84센치
보2층사무실
**남곡당(南谷堂) 덕명대종사(德明大宗師, 1926~2003)는 이치에나 일에 두루 밝았고 한평생 원융과 화합의 삶을 살았다. 대장부의 당당한 풍채에 고준(高峻)한 선기(禪機)를 갖추었고 한 생애를 통해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으며 후학에 대해서는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했다. 특히 공사(公私)의 구분은 대쪽같았다. 불사를 할 때는 인과를 알아 처리했고 항상 은혜를 잊지 않고 보은하였다. 수행에 있어서는 지계청정(持戒淸淨)과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수좌정신을 곧추 세웠다.
스승이신 동산스님의 계맥을 이어받아 범어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사부대중에게 보살계를 설하였다. 범어사 주지를 맡아 선찰대본산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무문관인 휴휴정사를 건립했고 부산 불교계의 화합과 정진을 도모하여 부산불교연합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다. 스승을 따라 불교정화에도 참여했으며 종단의 중책인 총무원 재무부장과 원로의원을 역임했다. 평생 도제양성과 전법수행에 전념한 스님은 학교법인 금정학원(금정중학교) 이사장, 원효학원(해동중학교) 이사를 역임했다. 스님은 영암스님에게 어산(魚山)을 배워 장중하고 청아함을 드러냈다. 또한 천년고찰 안적사를 중창, 여법한 가람으로 일구었다.
덕명대종사는 1926년 4월15일 경남 울산에서 김영조(金永祚)를 부친으로 이을순(李乙順)을 모친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혜성(慧性)이다. 1951년 3월, 25세 때 범어사로 출가하여 동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계하고 덕명(德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54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아지녔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1954년)하고 이듬해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안거 이후 상원사 도리사 해인사 만덕사(태백산) 등 여러 선원에서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1959년 6월 파계사 선원에서 안거중 한 경계가 열려 게송을 읊었다.
‘학이 하늘높이 날아 쇳소를 이끄니(鶴飛長天鐵牛牽), 한가로이 오고감에 하릴 없구나(閑來閑去無他事).’
이듬해 범어사 선원 청풍당에서 스승 동산스님에게 자신의 경계를 내보였다
교학을 익힌데다 선지(禪旨)까지 툭 트여 선교에 밝은 안목을 갖춘 덕명스님은 후학양성과 전법교화에 나섰다. 1965년 기장 앵림산 안적사 주지를 맡았으며 1974년 중앙종회의원, 1978년 총무원 재무부장, 범어사 주지, 학교법인 금정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0년 부산불교연합회를 창립, 초대회장에 취임했으며 1986년 원효학원 이사를 맡았다. 1996년 선찰대본산 범어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 1997년 원로의원이 됐다. 2002년 서해(瑞海) 흥교(興敎)스님에게 계맥을 전수, 범어사 전계대화상을 물려주었다. 2003년 스님은 당신의 소장품을 범어사박물관에 기증하고 12월2일 새벽4시 안적사 조실에서 세연을 다하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52년이다.
스님이 남긴 열반송이다.
‘꿈같은 생애 칠십년(夢幻生涯七十年).
오늘 육신 벗고 고향에 돌아가네(今朝脫殼還本鄕). 앵림산 고요한 속에 달 기울고(月落鶯林寂廖裡), 오경 범종소리 하늘 차갑다고 알리네(五更鐘聲報天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