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달제(吳達濟)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화가로, 그의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09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오윤해(吳允諧)이다. 조선 중기에 매화를 잘 그렸던 문신이자 화가인 오달진(吳達晋)이 오달제의 동생이다. 오달제는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26세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했다. 이후 그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등을 지냈다.오달제는 청(淸)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론자였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중 인조(丙子胡亂)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을 때에도 청나라와의 화친을 극구 반대하였고,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는 척화(斥和)의 주모자로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는 청나라에서도 협박과 회유에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했고, 29세의 나이로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오달제는 함께 청나라에서 형을 당한 홍익한, 윤집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라고 불린다. 오달제의 고향에는 그의 절개를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오달제는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는 충열(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오달제의 저술로는 그의 유고집인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전한다.오달제의 작품으로는 매화도가 몇 점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묵매’(墨梅)와 ‘설매’(雪梅)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굵은 가지는 화면 한쪽 하단에서 사선으로 뻗어 올라오다가 다른 쪽으로 휘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굵은 가지 주위로는 새로 난 가지가 곧게 뻗어 올라가거나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가고 있다. 능숙한 붓질을 사용한 가지 표현은 오달제의 기량을 확인시켜준다. 대담하고 활달한 필치로 그려진 두 작품은 모두 오달제의 기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묵매’에는 숙종(肅宗)과 영조(英祖)가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며 내린 어제시(御製詩)가 적혀 있다. 오달제의 증손이자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오언유(吳彦儒)가 두 어제시를 적었다. 그림 위에 이어진 비단에 쓰인 시는 숙종이 1705년에 지은 것이다. 숙종의 시에는 삼학사의 절의와 오달제의 충효, 충신의 후손이 이어지지 않음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화면 왼쪽 상단에 적힌 시는 영조가 1756년에 내린 것으로, 영조가 이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직접 감상한 뒤에 하사했다고 전한다. 영조의 시에는 병자년을 다시 맞는 감회와 오달제의 충성심에 대한 추모, 그리고 숙종의 행적을 따른다는 내용이 담겼다.‘설매’는 진한 먹으로 그려진 ‘묵매’와 달리 담묵(淡墨)으로 부드럽게 그려졌다. 화면 하단에 바위와 대나무가 곁들여져서 매화의 강인함을 한층 부각시켰다. 눈이 덮인 줄기에는 섬세한 붓질이 반복되어서 입체감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입체감은 당시 매화도에서 드물게 나타났다.오달제는 김시(金禔), 이정(李霆), 송민고(宋民古)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묵매화가로 꼽힌다. 그러나 네 화가의 매화도는 구도나 가지 표현, 꽃 모양 등에서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여서 당시에 여러 묵매화풍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