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1.5*31.5센치
보외1층2상4
**刊記推定:乙未二月日...李敬興(1585-1657)撰
**남곤 1471 ~ 1527 본관의령
본관 의령(宜寧). 자 사화(士華). 호 지정(止亭) ·지족당(知足堂).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후손이지만 직계 자손은 아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1489년(성종 20) 생원시(生員試)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4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개혁적인 성향의 신하였으며 성종 때 윤필상(尹弼商)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또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직언을 하다가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박경(朴耕) 등이 모반하였다고 고변한 공으로 이조참판 ·대사헌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이어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뒤에 찬성을 지내고, 1518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 명(明)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 귀국하였다. 종계 변무란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왕 4명을 살해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가 모호했기 때문에 대간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예조판서가 되었다. 남곤은 당시 으뜸가는 문장가로 사장(詞章)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신진세력으로 분류되는 조광조는 성리학(性理學)과 수신(修身)을 강조했다. 이때부터 두사람은 이견이 대립되어 갈라서게 되었다. 조광조가 주도하는 젊은 신진세력들은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을 장악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남곤은 소인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1519년 훈구파 대신으로 심정(沈貞) 등과 기묘사화를 꾸며, 집권자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1523년 영의정에 올랐다. 만년에는 과거를 자책하고 자신의 글 때문에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평생의 사고(私稿)를 마당에 쌓아놓고 불태워 버렸다. 사후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으나 1558년 관작(官爵)과 함께 삭탈되었다.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기묘 삼흉(三凶)으로 불렸다. 문집에 《지정집》, 저서에 《유자광전(柳子光傳)》 《남악창수록(南岳唱酬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