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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장2상3
**序: 丁未(1967)...權龍鉉
跋: 李東鎭
刊記(推定): (家狀)...卒干乙酉(1945), (序)...圖壽之...丁未(1967)
**개항기 고령 출신의 학자.
조상(曺塽)[1876~1945]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봉강(鳳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규승(曺奎承)이며, 증조할머니는 오원(吳瑗)의 딸 해주오씨(海州吳氏)이다. 해주오씨는 효부(孝婦)로 정려(旌閭)를 받고, 복호(復戶)의 혜택을 입었다. 또한 『성주지(星州誌)』에 효행이 수록되었으며,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1862~1938]이 「효부전(孝婦傳)」을 지었다. 아버지는 조정환(曺珽煥)이며, 어머니는 장무헌(張武憲)의 딸 옥산장씨(玉山張氏)이다. 부인은 석능악(石能岳)의 딸 충주석씨(忠州石氏)와 나주임씨(羅州林氏)이다
조상은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명으로 서찬규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1917년을 전후하여 전우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의 요지로 삼아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는 상사(上舍) 이병운(李柄運),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고암(苦庵) 이종익(李鍾翼), 덕암(德庵) 박순호(朴純鎬) 등과 교유하였다. 조상의 문인이었던 김재철(金在喆), 조긍환(曺兢煥), 이동진(李東鎭) 등의 제자들은 스승의 학은(學恩)에 보답하고 동문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삼일계(三一契)’를 만들고, ‘후송재(後松齋)’를 건립하여 매년 모여서 정읍례(庭揖禮)를 행하였다. 삼일계의 서문과 후송재의 기문은 성기운이 지었으며, 후송재명(後松齋銘)은 이종익이 썼다.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와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문하에서 수학하여, 기호 낙론계열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문인들에게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강조하였고, 부모와 임금과 스승은 나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신 은혜가 똑같이 중요하므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자세로 가르쳤다.
『심성이기설(心性理氣設)』과 『대학석의(大學釋義)』가 있다. 2012년 증손 조택상(曺澤相)[조호상(曺鎬相)]이 『봉강문집(鳳岡文集)』(2책)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서문은 1967년 7월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묘갈명은 송시열의 후손인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1902~1972]이 썼으며, 가장(家狀)은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조을환(曺乙煥)이 썼다. 2012년 입춘(立春)에 후학들이 조상의 학덕을 기려서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강학소였던 후송재에 세웠다.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