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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장3상4
**被傳者: 權策
序: 李義國 ; 金東鎭
跋: 宋浚弼 ; 柳淵龜
跋: 歲赤午...尹是重
**조선 전기 영해에 정착한 충신
권책(權策)[1444~?]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의 충신이다. 권책의 두 형인 권저(權箸)와 권서(權署)가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화를 당하자, 권책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로 유배를 갔다. 이후 영덕 지역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입향조가 되었다.
권책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권백종(權伯宗)이고 할아버지는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낸 권시(權恃)이다. 아버지는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1418~1441]의 사촌이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지낸 권자홍(權自弘)이다.
증조할아버지 권백종의 손녀가 문종의 비가 되었기에 권책의 집안은 단종의 외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1455년(세조 1) 세조에 의해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이후 종부(從夫)였던 권자신(權自愼)[?~1456]과 두 형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참수를 당하였다. 당시 13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던 권책은 연소(年少)하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지고 영해로 귀양 가는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1457년(세조 3)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의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참수당하자 죽령까지 찾아가 애도했으며, 집 뒤편의 바위에 매일 올라가 왕을 그리워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권책은 평생토록 세조가 있는 쪽으로는 바라보거나 앉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권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저술한 모든 것을 불태우도록 했는데, 이는 화(禍)가 후손들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손인 권호(權浩) 등이 단종에 대한 권책의 충성을 기리고자, 숙모전(肅慕殿)에 추향(追享)된 기록 등을 모아 『오봉선생실기』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