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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코19상1철
**안희원 (安禧遠) : 1846(헌종 12)~1919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희원(禧遠). 자는 길수(吉叟). 호는 시헌(時軒).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언론이 빼어나고 기상이 너그러웠으며 조정에 나가거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중망이 쏠렸다.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선임 되었는데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대사간(大司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부응교(副應敎), 통레원(通禮院) 좌통례(佐通禮)를 역임 하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직하고 귀향 하였더니 1903년(광무 7)에 관찰사 박제흥(朴齊興)의 주천으로 비서원승겸장레원장례(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를 제수하였다. 갑신정변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元世凱)가 왕에게 독대(獨對)를 청하자 분개하여 진언하기를 "원의 공이 비록 중하지만 외국의 사신이고 신 등은 못났어도 시신인데 어찌 외신(外臣)과의 독대를 용납하겠습니까?" 하고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1909년에 능에 친히 제사 드릴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서 집존(執尊)한 공로가 있어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1918년에 병산서원(屛山書院) 원장에 피임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융희처사(隆熙處士)로 자처하며 두문불출 하더니 삽포(부북면 사포리)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全集)을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시헌유고(時軒遺稿) 5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