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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18.8*27.5센치
보외1층스텐장315상7
오문현
1855년(철종 6)∼1927년. 조선 말기 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우삼(友三)이고, 호는 유산(酉山)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경상남도 거창(居昌) 가조면(加祚面) 장항리(獐項里) 출신이다.이조판서(吏曹判書) 오봉길(吳逢吉)의 후손이다. 고조는 오덕겸(吳德謙), 증조부는 여재(旅齋) 오련(吳練), 조부는 오희주(吳希周)이다. 부친 오치규(吳致奎)와 모친 강진안씨(康津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안처규(安處珪)이다. 부인은 이상기(李相夔)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몸은 토실하고 이마가 넓었으며, 눈썹과 눈동자가 빼어나게 빛났다. 피부는 백옥같이 희었으며, 음성은 큰 종소리와 같이 맑았다.8세에 공부를 하는 데 말이 어눌하여 책을 읽지 못하자 부친이 가엾게 여겨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노력하여 입을 열면 줄줄이 암송하게 되었다. 행실 또한 깨닫지 못한 것이 있어 질책을 받으면 열심히 노력하여 고쳤다.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하며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1919년 봄 만학정(晩鶴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의단(義團)의 수장이 되어 민중들을 이끌고 거창군부(居昌郡府)로 가고 있는데, 일본 병사들이 말을 타고 오가며 민중들을 향해서 발포를 하였다. 민중들이 두려워 떨자 그는 의(義)로써 죽는 것이야 말로 명예로운 것이라며 독려하였다. 일본 병사들이 쏜 총탄을 맞아 두 사람이 죽자 남은 민중들은 흩어져버렸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분함을 누르고 벗들의 집에서 피신해 있다가 산속을 전전하며 지내다 붙잡혀 일본 헌청(憲廳)으로 끌려가 형장(刑杖)을 받았다. 그들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자 조금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이 계속 항일운동을 할 것인지 묻자 끝까지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그의 뜻을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두고 가버렸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2남은 오한용(吳漢鏞)과 오한종(吳漢鐘)이고, 2녀는 김무현(金武鉉)과 변성식(卞性植)에게 출가시켰다.묘소는 경상남도 합천(若士) 약사방(若士坊) 선영(先塋)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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