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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업(鄭鎭業)[1916~1983]은 1916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태어났다. 월초(月礁), 월초(月艸), 월석(月石), 마석(馬石), 노을, 전노을(全魯乙), 도라지(都羅芝), 남국성(南國星), 심야월(沈夜月), 용마산인(龍馬山人) 등의 별칭으로 불리었다. 1930년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34년 3월 8일 졸업하였다. 1940년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에서 잠시 수학하였다.
정진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 영화 등에 관심을 가져 단편 소설 「가지[茄]」가 경상남도 문예 전시회에 입선하였다고 한다. 1936년 이광래(李光來)가 이끌던 연극 단체 극예사와 황금좌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5월 이태준(李泰俊)의 추천으로 『문장』에 단편 소설 「카츄사에게」가 실려 문단에 데뷔한 이후 창작과 연극 활동에 전념하였다. 광복 이후 극작가이자 연출가, 배우로서 김수돈(金洙敦)과 경상남도 및 부산의 연극계를 이끌면서 후진 양성에도 일정 부분 기여를 하였다. 광복기 마산에서 연극 공연을 주도하였던 정진업은 1947년 『경남 교육』 편집장을 거쳐 1948년 『부산 일보』 초대 문화부장이 되어 부산의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복기 부산의 문학계 형성에는 정진업을 비롯하여 홍원(紅原), 고려송, 전훈 등 언론계 인사들의 역할이 컸다. 그중 좌파 민족주의자였던 정진업은 『부산 일보』를 매개체로 삼아 시대 현실에 대한 강건한 비판 정신을 표출하면서 부산 문학사의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상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좌익계 문화 단체의 조직원으로 오인되어 1950년 8월 『부산 일보』를 나와야 했다. 이후 거제에서 부산으로, 다시 마산으로 떠돌았다. 1951~1953년 거제 하청중고등학교[현 경남산업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지냈고, 1953년 부산 항도고등학교[현 가야고등학교]로 옮겼다. 같은 해 『국제 신문』 문화부장을 맡아 언론계에 복귀하였다. 1958년에는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0년의 4월 혁명[4·19 혁명]은 정진업에게 내재되어 있던 현실주의적 경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 일보』에 게재한 시 「계도(系圖)-사월십구일의 초혼(招魂)을 위하여」와 4월 혁명 기념 시집 『힘의 선언』에 수록된 「노래 속에 나오는 니이나처럼」[1960], 비평 「민주주의는 살아 있다-마산 사건의 서민적인 동기」, 「문학인은 최초부터 자유인이다-혁신 세력에의 편승을 경계하자」 등 정론 직필로 민족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1964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마산지부 부지부장, 1967년 한국문인협회 마산지부장을 지내고, 1978년 시 동인지 『해조』 발간을 주관하는 등 주로 마산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정진업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번역 등 폭넓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줄곧 지역 문단에서 활동하였던 까닭에 주류 문단에서 명성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정진업은 한결같이 시대 현실과 사회 정의를 노래한 민족 문학인이었다. 또한 교사, 언론인, 연극인으로서 지역 문화 발전과 후진 양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정진업은 1983년 3월 28일 부산백병원에서 급성 뇌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