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권시(權諰, 1604~1672) 선생의 문집인 [탄옹선생집(炭翁先生集)] 목판본 全7冊(본집12권 6책, 年譜 附錄 1책) 완질본으로 년보 말미에 '戊午(1738)春刊 板在公州道山書院' 간기가 있다. 약간의 퇴변색, 얼룩이 있으나 상태 양호하다.
<크기> 20.5×31.5cm
<참고> 권시(權諰), 1604(선조 37)∼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랑 득기(得己)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도정(都正) 첨(瞻)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행(志行)이 절이(絶異)하여 사람들이 안자(顔子)에 비유하였다. 9세 때 이미 훌륭한 시를 지었으며, 15세에 이기지설과 사칠지변(四七之辨)에 정통하였다. 1636년(인조 14)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집의·진선(進善) 등을 거쳐 1658년(효종 9)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찬선(贊善)에 오르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한 뒤에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송문제가 있을 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廣州)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 1668년 송준길이 임금에게 “시는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하여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공주(公主 : 현재 大田)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그가 죽자 좌참찬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대전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탄옹집』 7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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