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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16*26.7센치
보외1층캐비넷52-2-1
**奇正鎭 1798 ~ 1879
조선 후기~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초명은 금사(金賜)이다.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후손이며, 부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기재우(奇在祐), 모친은 안동권씨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5세에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고, 7세부터는 경서와 사서(四書) 및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읽었으며, 8세 때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리(性理)에 관한 문답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에는 이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하여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통달하게 되어 신동이라고 불렸고,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는 노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고 한다. 1815년 18세에 양친을 여의고 전북 순창(淳昌)에서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고, 산사에 들어가 정좌하여 독서와 사색의 삼매경에 들기도 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1828년 31세로 향시에 응시하였고, 183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시작으로 1835년에는 현릉참봉(顯陵參奉), 1837년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45세 때는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으로 사임하여 귀향하였다. 60세에 내려진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 현감의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하였다. 이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는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사헌부집의 · 동부승지 · 호조참의 ·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이어 공조참판 ·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79세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77년 장성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조성가(趙性家)가 행장을, 면암(勉岩)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다. 이황 · 이이 · 서경덕 · 임성주(任聖周) · 이진상(李震相)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자 6대가(大家)로 칭해진다.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기우만(宇萬)과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김석귀(金錫龜) · 정의림(鄭義林) · 정재규(鄭載圭)를 비롯하여, 김녹휴(金錄休) · 기문현(奇文鉉) · 조성가(趙性家) · 이희석(李僖錫) · 이최선(李最善) · 기삼연(奇參衍) · 조의곤(曺毅坤) 등의 노사학파 제자에게 전수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지인들에게 보낸 간찰을 비롯한 서간과 『어안집(魚雁集)』 중의 글씨, 그리고 상소문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