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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20
보49-4-2
**한덕연
한덕연(韓德鍊)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중(正中), 호는 송계(竦溪), 초휘(初諱)는 덕수(德銖)이며, 1881년(고종 18) 11월 27일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교전(校前)마을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한운복(韓雲福), 조부는 한재언(韓在彦)이다. 아버지는 한잠범(韓岑範)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수위(金壽位)의 딸이다. 부인은 나주 정씨(羅州丁氏)로 정대천(丁大天)의 딸이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니 아들은 한병구(韓秉求)·한찬구(韓燦求)·한선구(韓善求), 사위는 이태근(李泰根)이다.
한덕연은 어려서부터 중후(重厚)하고 영명(穎明)하여 또래들과 놀지 아니하고 어른 곁에서 가르침과 훈계를 따랐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낭산(朗山) 이후(李垕)에게 수학했으며, 매일 9가지를 반성하였으니, 즉 지심(持心)·지신(持身)·발언(發言)·집사(執事·독서(讀書)·사친(事親)·사천(事天)·여인(與人)·응물(應物)이었으며, 사방 벽에 선현들의 잠명(箴銘)을 걸어 두고 마치 엄한 스승이 계신 듯 우러러 보며 실천하기를 힘썼다.
한덕연은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 생전에는 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병중에는 북두칠성에 빌며 산천을 헤매어 약초를 구해 구완하였으며, 상중에는 예제(禮制)를 철저히 지켰다.
고종이 승하하자 성복(成服)하고 3년을 지냈으며, 일본인이 성씨를 갈아야 한다고 위협을 하자 “성은 조상과 부모가 혈통을 자식에게 전한 것으로서 나도 또한 후손에게 남겨줘야 하는 것이다”라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중도에 화산(華山) 옥정동(玉井洞)에 들어가 수양하니 배우러 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강화된 일경(日警)의 감시로 인해 화산을 떠나 의흥(義興) 삼산(三山)과 영천(永川) 임고(臨皐)의 매호(梅湖)를 거쳐 영천시 신녕면 연정리에 옮겨 살게 되었는데, 따르며 배우는 사람들의 수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한덕연은 1956년 10월 7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996년 후학들이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연계서원(蓮溪書院)을 세워 봉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