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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3,4,5,6,7,8,9,10,11,14,15,16,17,18,19,20,21,22,23,외집1,2
보66-3-1
*김재화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문인.
김재화는 영남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면모와는 달리 문인으로서도 명성이 상당히 높았다. 김재화는 당시 영남 일대에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심재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제자로, 창강 김택영(金澤榮)[1850∼1927]·경재 이건승(李建昇)[1858∼1924] 등 기호 지방의 문인들과도 문장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쳤다.
본관은 청도.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순재(醇齋). 청도 김씨의 시조인 김지대의 후손으로 청도 소태(小台)[현 밀양시 청도면] 일대에 살아온 사족(士族)의 후손이다. 아버지 김태규(金泰圭)와 어머니 경주 최씨 한구(翰九)의 딸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김재화(金在華)[1887∼1964]는 숙부인 소강(小岡) 김태린(金泰麟)[1869∼1927]에게 20세까지 경서를 배웠고, 숙부의 소개로 22세인 1908년 심재 조긍섭의 제자가 되어 학문과 문장을 공부했다. 심재가 당대의 거유(巨儒)인 면우 곽종석(郭鍾錫)[1864∼1919]에게 김재화를 소개하자, 곽종석은 김재화가 조긍섭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며 ‘한산두(韓山斗)[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를 가리키는 말]’라고 칭찬하였다. 32세 때까지 문장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서 김택영·이건승 등과 교유하며 문장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그러나 1919년인 33세 때부터 병을 얻어 문장에 대한 관심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를 가르치면서 학문에 침잠하였다. 1933년 47세 때에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작업을 했는데 의견이 분분하여 3년을 끌자, 이를 중재하여 문집이 간행되도록 하였다
김재화는 국권 상실의 시대에 도학의 정통을 고수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다. 20대 무렵부터 한유(韓愈)의 고문(古文)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김재화는 내용적 측면(道)을 중시하는 도학자의 문에 대한 입장이나 형식적 측면[文]을 중시하는 고문가의 입장과는 달리 본말경중의 차이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내용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 그리고 이 둘의 통일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개인적 역량인 기(氣)를 강조하였다. 이는 김재화의 문장론이 이전 도학파의 재도론(載道論)과 문장가의 주기론(主氣論)을 절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론을 바탕으로 논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김택영의 여한십가(麗韓十家) 선정에 대해 문장 평가의 기준과 작가 선정, 시기별 층위 문제 등을 제기함으로써 논쟁을 촉발시킨 점은 실상과의 부합 여부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적극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1959년 73세 때에 사찬 군지인 『속오산지(續鰲山誌)』와 『정정 오산지(訂正鰲山誌)』를 간행하였다. 김재화가 죽고 난 뒤인 1965년 제자들과 조카인 김필호(金弼鎬)가 주축이 되어 밀양(密陽) 사의정(四宜亭)에서 신연활자본 『순재 선생 문집(醇齋先生文集)』 13책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