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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78-3-1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신태우(申泰佑)[1851~1926]의 문집.
신태우는 자가 경선(敬善)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신석범(申錫範)이고 어머니는 풍산(豊山) 홍씨(洪氏) 홍희택(洪羲宅)의 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지고 난 뒤 항상 지내던 서실(書室) 근처에 산소를 썼는데, 주변 한 사람이 앉을 만한 바위에 앉아 오열을 하곤 하여, 그 바위를 망추암(望楸巖)이라고 한다. 또한 가훈(家訓) 21조를 적어 자손들이 배움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합병하였을 때는 성현의 문묘(文廟)도 없애버릴 것을 염려하여 만산(晩山) 배병원(裵炳元), 몽헌(蒙軒) 어재원(魚在源) 등과 함께 위패를 문묘 뒷산에 묻었다. 75세에 세상을 떠나 남양리(南陽里) 백석산(白石山) 유좌(酉坐) 들에 묘를 썼다. 부인 인천(仁川) 이씨(李氏) 이병호(李炳浩)의 따님과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신일균(申一均)·신차균(申次均)·신진규(申珍圭)이며, 딸들은 각각 함종(咸從) 어만우(魚萬愚)·기성(岐城) 반달위(潘達渭)·금관(金官) 김창현(金昌鉉)·신안(新安) 주병한(朱柄漢)과 결혼했다.
신태우가 1926년 사망하고 여러 해 뒤에 배재우(裵在佑), 박효정(朴孝廷), 이주영(李周瑛) 등이 중심이 되어 돈을 추렴하고 남긴 글을 모아 간행하였다. 서는 문봉호(文鳳鎬)가 썼다. 웅천현(熊川縣)의 어로(漁撈)와 소금 및 미역에 관한 일을 맡은 어조 염전 급곽 전고(漁條 鹽田 及藿 田庫)에서 여러 개의 책을 만들었다고 뒤표지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기관의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