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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좋음 크기:20.5*29.8센치 보63-3-2 **강만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개숙(皆叔), 호는 치재(癡齋).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강계오(姜繼吳)이고, 할아버지는 강시언(姜時彦)이다. 아버지는 송암(松庵) 강필주(姜弼周)이며, 어머니는 황주변씨(黃州邊氏)로 변태(邊泰)의 딸이다. 모산(茅山) 강민저(姜敏著)가 형이다. 강만저(姜萬著)는 1655년(효종 6) 3월 13일 전라남도 영광의 문례방에서 태어난 뒤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로 옮겨 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 강필주와 형 강민저가 모두 당대에 학덕으로 이름이 있었으니, 그러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다만 그의 유고가 200여 년 동안 간행되지 않아 행장(行狀) 등이 없어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 작품이 180여 편이나 되고, 문장도 9편이나 되며, 시문의 격조가 있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병순(宋秉珣)의 서문이나 강천수(姜天秀)의 발문을 보면 “강만저는 정훈과 사우(士愚)의 지도로 덕과 학문이 조숙하였고, 세속의 사람들과는 달리 출세나 공명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신병 때문에 시골집에서 은거하며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고결한 성품을 기르면서 자칭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으로 호를 치재라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문예의 재주가 넉넉하고 뛰어나 누구나 미칠 수 없는 능력이 있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고 한 것은 겸손한 것이지 진정으로 한 말은 아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시의 내용으로 보면 성당(盛唐) 대의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시를 차운한 것이 많고, 우리나라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사암(思庵) 유숙(柳淑) 등의 시를 차운하고 있어 그의 시재(時宰)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 작품이 지어진 연대로 추정하면 76세 때 지은 시가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장수를 누렸다고 하겠다. 1681년(숙종 7) 「제외구최공문(祭外舅崔公文)」을 지었고, 1701년(숙종 27) 「치옹자서(癡翁自序)」를 지었다. 또한 1704년(숙종 30) 「차덕양유고기자용(次德陽遺稿寄子容)」을 지었으며, 1705년(숙종 31) 12월 23일 형 강민저가 세상을 떠나자 「제백씨모산재문(祭白氏茅山齋文)」을 지었다. 다음해 12월에는 「병술세제일(丙戌歲除日)」이란 시를 지었고, 1707년(숙종 33) 2월 6일 「이월육일도선운사구점(二月六日到仙雲寺口占)」, 그 해 「자음(自吟)」을 지었다. 1708년(숙종 34) 「무자정조(戊子正朝)」, 1711년(숙종 37) 7월에 「신묘칠석(辛卯七夕)」, 1730년(영조 6) 12월에 「경술세제일(庚戌歲除日)」이란 시를 지었다. 저서로 『치재집(癡齋集)』 2권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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