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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본 강병주(姜柄周) 두산집(斗山集) 2책완질

목활자본 강병주(姜柄周) 두산집(斗山集) 2책완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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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조선
모델 3006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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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활자본 강병주(姜柄周) 두산집(斗山集) 2책완질 상태좋음 보69-1 **남명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에선 1894년 심재 조긍섭, 회봉 하겸진, 우산 한희령 등 강우지역의 젊은 학자들이 중심이 돼 ‘남명선생 문집’을 교정하고 있었다. 당시 20대의 젊은 학자들이 중심이 돼 남명집을 교정한 만큼 너무 많은 내용들을 새롭게 고쳤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때 남명집을 교정하면서 남명선생이 저술한 내용뿐만 아니라 남명 선생의 일생과 학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남명선생편년(南冥先生編年)’을 함께 엮었다. 이때 엮은 ‘남명선생 편년’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남명선생의 일생과 교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남명선생편년’의 서문은 당시 강화에 살았던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이 지었는데, 그 서문을 받아온 선비가 바로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이다. 두산은 당시 대원사에서 하성원(河聖源) 조호래(趙鎬來) 등과 함께 남명선생 학기를 교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1897년에는 강화도로 이건창을 찾아가 남명선생 편년 서문을 받아온 것이다. 1891년에는 단성 법물리(法勿里) 이택당(麗澤堂)에서 ‘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을 간행할 때, 박치복·김인섭·김진호·윤주하 등과 처음부터 두산은 참여를 했다. 1886년 성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문인들이 1887년 가을에 성재선생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단성의 율곡사에서 모였으나 흉년이 들어 이루지 못하고 다시 2년 후인 1889년 가을 삼가 뇌룡정에 모여 간행을 결정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성재의 제자들에게 통문을 발송했는데, 이때 서명한 사람이 박치복·김인섭·김진호·윤주하 등 32명이었는데, 두산도 함께 참여를 한 것이다. 두산은 성재 허전의 문인이다. 1857년 당시 서울 냉천동(冷泉洞)에 살고 있던 성재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강우지역의 많은 성재 문인들이 1864년 성재가 김해부사로 내려왔을 때, 집지한 것을 생각해 볼 때, 두산은 일찍부터 성재의 학문을 듣고 천리길 서울로 올라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산 강병주는 1839년 곤양 옥산리(玉山里)에서 죽헌(竹軒) 지준(之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로부터 숨어 사는 선비가 많았다는 곤명 은사동(隱士洞)이 바로 그가 태어난 곳이다. 현재 세종과 단종 태실지가 있는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옥동(玉洞)마을이 바로 옥산리이다. 본관은 진양으로 은열공 강민첨의 후예이다. 조선 태종때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강수명(姜壽明) 역시 드러난 선조이다. 두산의 8세조 만송(晩松) 강렴(姜濂)은 약관의 나이로 남명 선생을 찾아 산천재를 방문해 남명의 제자가 되었다. 남명의 벗·제자들의 행적을 적은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에 강렴에 대해‘독학호의(篤學好義)’하는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독실히 배우고 의로운 일하기를 좋아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두산이 ‘남명선생학기’를 교정하는 등 남명선생 선양에 남다른 열의를 가졌던 것은 선대 때부터 맺어온 남명선생과의 인연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두산은 어릴때부터 자질이 남달랐으며, 조부인 중은공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두산의 조부 중은(重隱) 강석좌(姜錫佐)는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은거하면서 몸을 바르게 가지고 한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면서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은사동에서 평생 은거한 선비이다. 조부 중은공은 두산을 가르치면서 장차 크게 될 아이라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8세때 소학을 배우면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을 했으며, 15세~16세때는 사서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기 시작했으며, 월촌 하달홍을 찾아가 질정을 하기도 했다. 일찍이 월촌은 “우리 남쪽의 학자들이 경의(敬義)가 학문의 요점임을 알고 몸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것은 남명과 겸재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옥종의 모한재에서 평생 학문에 정진한 선비인데, 두산 역시 월촌과 모한재에서 학문에 정진을 하게 된다. 1857년 즉 19세 때 서울 냉동으로 성재 허전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때 성재를 찾아가 ‘위기지학(爲己之學)’등의 학문 요점을 듣고 이를 궁구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때부터 ‘중용’과 ‘대학’공부에 더욱 치중하여 ‘대학이도(大學二圖)’‘중용육대절일도(中庸六大節一圖)’‘진학차제일도(進學次第一圖)’‘성현언지일도(聖賢言志一圖 ) ‘지인일도(知仁一圖)’ ‘부동심일도(不動心一圖)’‘동명일도(東銘一圖)’‘계사제일장일도(繫辭第一章一圖)’‘인륜일용통오상일도(人倫日用通五常一圖)’ 등 10도를 그려 알기쉽게 풀이하였다. 학문에 깊이가 대단하지 않고는 그림으로 그려 가면서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할때, 이 그림들을 통해 두산의 학문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부친 죽헌공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는데, 곁에서 모시면서 고기와 생선을 하루라도 드리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날씨가 좋지않아 시장에 가지 못할 때는 직접 낚시를 해 고기를 올려 부친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임술년에 삼정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에게 대책을 물었는데, 두산이 이에 응하는 소를 지었으나 부친의 명으로 올리지는 못하였다. 곧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치르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도 했다. 1876년 병자년에 큰 흉년이 들자 인근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면서 구휼에 앞장섰으며, 1879년에는 계남 최숙민 등과 모한재에서 강학을 주도했는데, 인근 선비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1880년에는 월고 조성가 등과 호남지방을 여행하고 많은 시를 남겼으며, 1881년(고종 18)에 조정의 개화정책에 반대해온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이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할 때, 두산은 이에 적극 참여를 한다. 우선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등을 방문해 자신의 뜻을 설명하자, 만성과 후산은 “강우지방은 참여자가 심히 미약하다. 그대가 잘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두산은 곧 성주로 한주 이진상을 방문하고 동참의 뜻을 밝혔으며, 한주 아들 대계 이승희와 함께 적극 동참하게 된다. 1886년 스승인 성재 허전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을 입었으며, 이듬해 두산 아래 양곡으로 이사를 갔다. 현재 하동군 옥종면 두양마을이다. 1889년 종중의 의논을 모아 은열공 사당을 두방 옛터로 이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은열공 연보중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았으며, 한사공 연보, 만송공 실기 등을 출간했다. 1900년에 오산서숙(鰲山書塾)에서 강독을 개설하여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남천 이교우, 면우 곽종석 등 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들과 함께 향음주례를 시행하기도 했다. 1902년에는 ‘위정척사’의 내용을 상소했으며, 1908년 애국지사인 수당 이남규가 왜적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 마지 않았으며, 이 당시 후산 허유, 교우 윤주하, 복암 조원순 등 지역의 선비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자신도 두방재(斗芳齋)에서 노쇠한 몸을 조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9년 운명을 앞두고 자식과 조카들을 불러놓고 “평생 조심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이를 면하게 되는구나”라며 예의에 맞도록 장례를 치르라고 하고 눈을 감으니 향년 71세였다. 두산 강병주는 한평생 유림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선했던 선비로 여겨진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강우지역의 선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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