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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간행된 봉곡집(鳳谷集) 7권4책완질 상태보통이며 파장없음 크기:30*19.7센치 *송주석(宋疇錫) *1650(효종 1)∼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서구(敍九), 호는 봉곡(鳳谷). 시열(時烈)의 손자이며, 기태(基泰)의 아들이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수찬을 역임하는 등 청요직에 출입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시열이 죽기 5년 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해에 시열이 박세채(朴世采)·이단하(李端夏) 등과 문답한 시사(時事)를 정리하여 《향동문답 香洞問答》을 완성하였고, 시열의 유소(遺疏)를 직접 받았으며, 그뒤 당쟁과 관련된 가정사를 《구화사실 構禍事實》이라는 책명으로 남겼다 **鳳谷集, 宋疇錫(朝鮮)著. 7卷 4冊 宋疇錫(1650∼1692)의 文集. 1905년 7대손 宋秉璿이 만든 것을 1929년 등사한 것이 다. 宋疇錫의 자는 敍九, 호는 鳳谷, 본관은 恩津, 宋時烈의 손자이다. 1683년(肅宗 9 ) 增廣文科에 乙科로 합격, 分館하기도 전에 藝文館에 選補되자 少論인 尹拯의 攻擊을 받았다. 史官으로 있으면서 그는 보전이 불완전한 ≪文宗實錄≫과 ≪光海君日記≫를 印刷하여 諸史室에 分藏할 것을 請한 바 있고 弘文館博士, 司憲持平, 弘文館副校理, 龍潭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祖父인 宋時烈이 죽은 뒤에 그는 尤庵의 遺稿와 年譜 家狀 을 정리하다가 脫稿하지 못하고 죽었다. 1683년에는 朴世采와 香洞에서 문답한 「香洞 問答」이 있다. 「香洞問答」은 宋時烈이 李太祖의 威化島回軍을 尊周大義에서 나온 것이므로 徽號를 주어야 한다는 데 대하여 反對意思을 가진 朴世采와의 문답 이다. 宋 疇錫은 大儒學者요 정치가인 宋時烈의 그늘 아래서 官職에 나아갔다가 黨爭의 소용돌 이에서 헤어나지 못한 老論의 一人이있다. {卷1}:詩. 五言古詩 6首, 七言古詩 2首, 五 言絶句 7首, 七言絶句 39首, 五言排律 2首, 七言律 92首, 七言排律 2首 등. {卷2}:疏 3首(陳情疏, 陳戒疏, 乞歸養祖父疏), 書啓 2首(嶺南史閣檢後啓稟, 前監察李潭被李益壽 彈劾後論啓), 書 19首(寄子有源 등). {卷3}:雜著로 構禍事蹟, 香洞問答, 趨庭私記, 書 與高生聚, 治蜀尙嚴論, 策 등. 「構禍事蹟」은 中宗反正시에 愼妃를 廢妃시킨 처사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창한 朴祥 등을 邪論으로 몰아 罪를 준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派黨 分裂의 기원을 상고하고자 쓰여진 것이다. 「趨庭私記」는 1674년(顯宗 15) 宋時烈이 水原에 待罪하고 있을 때 모시고 있으면서 써 둔 日記이다. 「書與高生聚」는 濟州人 高生聚에게 보낸 서신인데 濟州島에 관한 약간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治蜀尙嚴論」 은 仁政을 배운 孔明이 그 배운 바를 버리고 蜀나라를 嚴治했는가에 대해서 논설한 것 이다. {卷4}:記 2首(荊樹堂記, 攀桂亭記), 跋 1首(石谷宋公眞蹟後識), 箴 1首(敬德祈 命箴), 箋 3首(擬本朝參贊臣白仁傑請以先正臣趙光祖從祀聖廟, 擬本朝太學生謝宋朝六臣 陞配大成殿 등), 婚書 2首(答崔氏婚書 등), 上樑文 3首(蘇堤蓮亭上樑文 등), 祭文 8首 (祭同春宋先生浚吉文 등). {卷5}:祖考尤庵先生家狀. 그의 行狀에 의하면 末年에 그가 尤庵의 遺稿, 年譜, 家狀을 정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家狀은 그의 死後에 다시 정리된 것이 아닌가 한다. {卷6}:行狀 1首와 墓表 3首 등. { 卷7}:附錄으로 그의 行狀과 墓表 謚狀(弘文提學 申應朝 씀), 祭文(權尙夏, 鄭澔, 宋相 琦, 成晩徵 씀) 등. 卷末에는 七代孫 宋秉璿이 쓴 跋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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