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歲戊辰年)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희암집(希菴集) 1책완질 상태아주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1*21.2센치
보1층캐비넷60-2-2**
고광선(高光善)의 서문 **손병엽(孫秉燁)의 발문이 있음 **채제공(蔡濟恭) 1720(숙종46)~1799(정조33) 조선의 문신.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응일(膺一)의 아들. 1743년(영조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정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73년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가 되어 균역(均役)과 염세(鹽稅)의 실시에 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조사하여 올렸고, 1758년(영조34) 도승지(都承旨)로 「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예조 참판(禮曹參判)·병조 판서 등을 역임, 1771년 호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예조 판서를 지냈다. 1776년(정조 즉위) 형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낸 후 이듬해 벽파(僻派)인 홍성범(洪相範)이 호위군관(扈衛軍官)과 공모하여 정조를 시해(弑害)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왕의 신변이 위태하자 창경궁(昌慶宮)의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수차에 걸친 벽파의 음모를 적발했고, 1780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권이 무너진 후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왕을 도와 충실하게 보필(輔弼)했다. 이듬해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서명응(徐明膺)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고, 이어 예조판서·평안도 병마절도사·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1788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790년 천주교도(天主敎徒)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공서파(攻西派)에 맞서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공서파의 배척을 받고 파직되었다고 1792년 좌의정에 복직했다. 그 후 여러 차례 공서파에 의해 삭직(削職)·부처(付處)·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곧 등용되고 천주교 처리문제를 위임받아 온건정책을 유지, 1793년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10여년간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1801년(순조 1)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할 때 관작을 추탈(追奪) 당했다가 1823년 신원(伸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