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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 사명대사의 문집인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舒難錄)1책완질 상태좋음 크기:30.2*20.4센치 보2-3-3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승장(義僧將)인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충성을 다해 난리를 이겨나가는 활동사항을 모아둔 전쟁활약 실기(實記)이다. 대사의 5대법손(法孫)인 태허당(泰虛堂) 남붕(南鵬)의 주선으로 영조 14년(1738년)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이 편집하여 영조 15년(1739년)에 현재의 무안면 중산리 대법사 자리인 구. 표충사(表忠祠)에서 개간(開刊)하였다. 내용은 갑오(甲午)년 4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陣營)에 들어가서 정탐한 탐정기(探情記)를 비롯하여, 명(明)나라 장군 유정(劉綎) 총병(總兵:備倭副總兵署都督僉事)과 만나 왜군을 격토하기 위하여 협력한 이야기, 일본에 건너가서 관료들과 나눈 문서 등 활약상과 그에 대한 후대사람들의 평(平)들이 담겨 있다. 책 머리와 끝에 김중례(金仲禮)의 서문과 송인명(宋寅明), 윤봉조(尹鳳朝)의 구발(舊跋) 신유한의 신간발(新刊跋)이 붙어 있다. 특히 이 말미에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등이 사명대사를 찬(讚)하는 절구(絶句), 율시(律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간행기(刊行記)에는 "상지십오년기미칠월밀양영취산표충사개간(上之十五年己未七月密陽靈鷲山表忠祠開刊)"이라고 써 있다 **밀주(밀양) 영취산 표충사 개간(密州靈鷲山表忠祠開刊)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책 **壬辰亂 때의 義僧將 四溟大師의 親筆 기록을 모아 놓은 책이다. 大師의 5때 法孫인 南鵬의 주선으로 1738년(英祖 14) 申維翰(1681∼?)이 편집을 하고, 이듬해 7월에 密州 (密陽) 表忠詞에서 開刊이 되었다. 卷首에 金仲禮의 序와 卷末에 宋寅明·尹鳳朝의 舊 跋과 申維翰의 新刊跋(1738년)과 釋明學(1739년)의 跋文이 있다. 내용은 우선 申維翰 의 편집에 의한 四溟大師의 親筆 <서亂錄> 本文(日記體문장)과, 四溟大師가 당시 참고 로 수집 收錄해 놓은 附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을 각각 상세히 표시해 보 면 아래와 같다. (1)「서亂錄」;人淸正營中探情記, 別告賊情, 往謁劉都督府言事記, 再 入淸正陣中探情記, 馳進京師上疏言討賊保民事疏, 復入淸正營中探情記(이상 1594년, 宣 祖 27), 上疏言事(1595년). 書4수(與圓光元佶長老書, 與承兌西災長老書, 與玄蘇書, 與 宿蘆禪師書). (2) 附錄;記松雲事蹟(《芝峯類說》中), 記松雲事蹟(《於于野潭》中), 記 松雲事蹟(《同五志》中), 記松雲事蹟(五臺山僧就惠所藏文藁中), 載松雲事蹟(《經亂錄 》中), 事蹟出密州誌松雲影堂給復承傳. 後尾에 四溟大師를 讚하는, 白沙(李恒福)·漢 陰(李德馨)·月沙(李廷龜) 등등 당대의 名士 公卿 십수명의 絶句 혹은 律詩를 수록하 고, 宋寅明·尹鳳朝의 跋文과 申維翰의 新刊跋·圭山沙門 明學의 附密州誌跋 등이 수 록돼 있다. 四溟大師에 관한 자료는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所에서 발행한 「護國大 聖四溟大師硏究」에 소개되어 있어 참고된다. **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 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守 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 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 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 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 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 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 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 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 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 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 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 (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 (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 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 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 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 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奮忠서難錄)>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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